한국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
이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우리나라 첫 애니메이션은 1956년 개국한 HLKZ TV 전파를 타고 방송된 러키 치약 CF로 보고 있어요. 치약을 의인화해서 만든 유머러스한 표현을 했죠. 여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요. 하나가 춘향이와 이도령 편이에요. 애니메이션을 보면, 춘향이가 치마폭에 치약을 가지고 있다가 이도령이 딱 나타나면 이도령한테 치마폭에서 치약을 딱 꺼내서 한양에 가더라도 이 치약을 쓰면서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며 전달하는 그런 장면이죠.
한국 최초 순수 애니메이션
최초의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은 1961년도 국립영화 제작소의 한성학, 박영일, 정도빈이 공동으로 제작한 '개미와 베짱이'예요. 이솝우화를 소재로 하는 한 5분 정도의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이었어요. 또 1960년에 신동헌 감독에 의해서 진로소주의 CF가 제작되었는데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죠. 흥겨운 노래와 다이내믹한 움직임으로 당시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또한 부산에 있는 경남 극장에서 상영되었다고 하네요. 제가 신동헌 감독님께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 당시 미국에 배를 타고 다녀오신 적이 있대요.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면서 선원들을 모티브로 해서 제작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또 신동헌 감독은 이 CF를 만들 때 자기 발가락으로 만들었다고 종종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도대체 이게 말인가 하고 물어봤더니 녹음기 2대를 가지고 한 대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그리고 그 위에 본인이 또 기타 연주를 하면서 이 옆에 있는 녹음기를 조작해야 되는데, 기타를 치니까 손이 없잖아요. 그래서 발가락으로 조작을 했다는 말이었어요. 진짜 신 감독님께 이건 직접 들은 얘기예요. 그분은 매년 한 100여 편의 CF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어요.
국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전
그리고 1967년 신동헌 감독은 '홍길동전'을 제작하였어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친동생으로 신동우 화백이 있었는데요. 함께 작업을 했죠. 신동우 화백은 1936년 함경북도 태생으로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가졌던 분이에요. 그의 대표작은 1965년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풍운아 홍길동'으로 1,200여 회에 걸쳐 연재된 만화인데요. 이것을 1967년 그의 친형인 신동헌 감독이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것이죠. 이 애니메이션은 개봉해서 4일 만에 10만 관객을 동원할 만큼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결국 서울 관객만 30만이었어요. 극장 수나 낙후된 그때의 시설이나 또 홍보, 이런 걸 보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그 파장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죠. '홍길동' 작품 또한 지금 상영된다고 해도 충분히 흥행성이 있을 정도로 탄탄한 스토리와 짜임새 있는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어요. 거기에 보면, 그 안에 유머가 살아있고요. 스토리의 반전과 재치가 넘치고 액션 장면 또한 매우 뛰어나서 지금 봐도 67년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예요. 하지만 이런 흥행보다 더 대단한 점은 이 '홍길동'이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에요. 애니메이션 제작과 관련된 노하우가 전무하던 시절에 미국, 일본의 애니메이션 서적을 연구해가면서 그동안 CF애니메이션으로 노하우를 쌓아갔던 신동헌 감독은 70분 분량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도전하게 된 거죠. 신동헌 감독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줄잡아 하루 평균 400명의 애니메이터가 1년을 꼬박 그림 작업에만 매달렸다. '고 말했어요. 셀룰로이드 필름에 원화를 채색할 물감이 없어서 학생들이 쓰는 일반 포스터물감으로 채색을 했는데, 이 물감은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금방 말라비틀어져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애니메이터가 붓을 들고 그 사진 작업 현장에 가서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며, 이 셀 애니메이션에서 그 셀을 구하기 힘들어서 미군에 가서 셀을 구입해서 사용하고 난 후에 다시 양잿물에 담가 헹궈서 다시 여러 번 사용하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그 당시의 이런 열악한 사정을 말씀했어요. '홍길동'에는 12만 5천여 장의 셀 그림이 소요됐고요. 이를 이으면 3천7백여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했습니다. 제작비는 당시 실사영화 평균 제작비의 10배에 가까운 거금 5천4백만 원이 투입되었죠.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불과 3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이 '홍길동'의 영화 필름이 지금은 한 벌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죠. 왜일까요? 그 이유는 그 당시 영화를 다 상영한 다음에 그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이 필름을 잘라서 나눠 갖기도 하고 극장에서 잘라서 팔기도 했대요. 새마을운동이 한참이었던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농가부업으로 장려되었던 밀짚모자를 만들면서 당시의 많은 필름이 가로로 길게 반으로 쪼개져서 모자 테두리 끈으로 장식되는 웃지 못할 쓰임새에 몽땅 없어지고 만 것이죠. 그래서 몇 년 전에 이 원본 필름을 여기저기 모으고 있다가 일본의 지방 도서관에 한국 옛날 영화 필름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또 '홍길동'을 직접 봤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게 돼서 발굴을 시작했다고 했어요. 당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은 '홍길동'은 일본으로도 수출돼서 어린이 교육용으로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또한 일본의 애니메이터가 한국에 관광을 왔다가 극장에서 이 조각난 '홍길동' 필름을 파는 것을 보고 대량으로 사갔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기증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완벽한 전체 길이의 복원은 아니지만, '홍길동'은 1995년 12월에 '돌아온 영웅 홍길동'으로 리메이크되어서 개봉되기도 했어요.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신 감독님은 잃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어요. 그는 다시 영화를 봤지만, 지금 상영해도 창피할 것 같지 않다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데, 좀 더 시간이 많았다면 하는 아쉬움도 조금은 남아있는 작품이라고 말했어요. 영상자료원은 이번 발굴에 대해서 단순히 애니메이션의 최초 작품을 찾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토대가 허약했던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 연구를 자극해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그 의미를 말했어요. 신동헌 감독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전' 또 후속작인 '호피와 차돌바위'를 제작해서 한국 필름 역사의 이정표를 남기신 분이에요.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과 문화계에 걸쳐 최고의 원로이자 산 증인이시죠. 1927년에 태어나셨으니까 지금 거의 90살이 다 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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